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인물 (문단 편집) ==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인물 == * '''[[아돌프 히틀러]]''' '''말이 필요없는 나치 독일 수장''' * [[헤르만 괴링]] 제국 원수이며 제3제국의 수치라고 불릴 정도로 무능해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독일 공군을 강군으로 키운건 엄연히 괴링이다. 괴링에게 잠만 쳐잤다고 일갈한 독일 공군 장교들도 이 사실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문제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독일군 전체의 문제다. 청년 시절에는 간지나는 모습으로 사교계에서 유명한 공군의 에이스였지만 낭심에 심한 부상을 입고 치료하다 보니 마약에 중독되어 전쟁 중반부터는 초기에 보인 명석한 면모는 거의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나 겨우 마약을 끊고 제정신을 차려 전범 재판 당시에 나치 인사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결국 사형 선고를 받자 숨겨놓은 청산가리 앱플을 씹고서 자살했다. * [[루돌프 헤스]] 카를 하우스호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지 웬 괴상한 짓이나 하고 다니는 오컬트 마니아였다. 나중에는 비행기를 타고서 영국에 그냥 협상하러 갔다가 잡혀서 포로로 살았고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서 죽었다. 히틀러도 허울 좋은 부총통 직위 빼곤 코딱지만큼도 챙겨준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에게 밀려나는 굴욕까지 맛보았다. 히틀러의 사상을 담은 [[불쏘시개]] [[나의 투쟁(자서전)|나의 투쟁]]을 받아 적었다. * [[빌헬름 카이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강직해 보이는 인상과는 반대로 나치 독일 최고의 아첨꾼으로 악명 높으며 군대 지휘도 잘 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다지 원한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참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전쟁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파울 폰 힌덴부르크]] [[타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대통령까지 해먹었던 양반이지만 사실 타넨베르크 전투도 그가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니었고 과장된 것이었으며 정치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히틀러를 끌어들여서 결국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에 대접이 매우 좋지 못한 인물이다. * [[프란츠 폰 파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하지만 역사는 그를 '''나치 독일 탄생의 1등 공신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슐라이허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파펜은 지지기반이 없었기에 힌덴부르크에 아부하며 독재하기 위하여 [[프로이센 쿠데타]]도 일으키다가 너무 막 나간 나머지 총리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히틀러와 나란히 손잡고 총리나 해먹으려다가'''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이후에는 숙청 당하지 않기 위해 깨갱거리게 된다. 뛰어난 외교 실력으로 살다가 전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치 독일은 자신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우겼다. 물론 세계적인 평가는 "너 때문 맞거든?" 이며 당연히 지금까지도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장본인 중 한 명이라고 까이고 있다. * [[http://www.proprofs.com/quiz-school/upload/yuiupload/2123565267.jpg?width=250|알프레트 빌헬름 프란츠 마리아 후겐베르크(Alfred Wilhelm Franz Maria Hugenberg)]] (1865년 6월 19일 - 1951년 3월 12일) 1865년 6월 19일에 하노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국회의원 출신인 아버지 아래 태어난 후겐베르크는 1891년에 범독일연맹을 설립했다. 후겐베르크는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지만 1907년에는 실업가로 직업을 갈아탔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광업은행 지배인으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1909년엔 [[티센크루프]] 사의 중역으로 초빙되어 은행업무와 철강계통의 업무를 담당하며 1918년까지 재무, 경리이사장을 지냈다. [[독일 제국]] 시절에 국민자유당 소속이던 후겐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에 독일국가인민당에 입당했다. 이 당은 자본가의 이익을 대표하는 보수우익반동적 정당으로 후겐베르크는 실업계와 산업계를 대표하는 정당에 참가한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겐베르크는 1928년에 국가인민당의 당수로 취임했고 바이마르 헌법체제를 비판하며 보다 급진적인 이념을 주장했지만 군주제 부활엔 부정적이어서 국가인민당 내부의 보수제정파 대부분이 이에 반발하여 탈당해 새로운 당을 결성했다. 1929년에 [[경제 대공황]]으로 경제위기와 공산주의의 대두를 우려한 실업계를 대표하여 후겐베르크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과 접촉하여 협력관계를 구축했지만, 후겐베르크가 [[듣보잡]]이던 히틀러를 키워줬다는건 과장이다. 서로 이용해 먹는 관계였고 여러번 사이가 틀어졌다.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보면 후겐베르크가 '''거의 은막의 제왕''' 수준으로 나오는데 후겐베르크는 독일 최대 재벌 티센크루프에서 월급 사장하다가 언론사를 인수한 인물로 나치와 히틀러 추종자인 프리츠 티센 밑에서 월급이나 받아먹던 인물이다. 그가 150여개나 되는 언론 신문사 영화사가 있었고, 언론을 장악해서 히틀러를 띄워주었다고 하는데 후겐베르크가 후원하는 철모단 독일인민당은 나치당과 대립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현재나 그 당시 독일이나 현재 우리나라처럼 여론 독점이 심하지 않다. 후겐베르크 언론사가 1위인 건 맞는데 2위가 공산당 계열이었고 나치당 또한 60여개 신문을 발행하는 언론 재벌이었다. 바이마르 시대 후반 베를린에만 일간지 주간지 등을 발간하는 언론 매체가 130여개가 난립했다. 뭐, 다만 당시 독일에서도 후겐베르크를 히틀러를 배후조종한 인물로 보는 시각이 없진 않았다. 그러던 중 슐라이허 내각이 들어서자 다시 파펜에게 구워 삶아진 후겐베르크는 나치당과 연대했고, 1933년 1월 30일에 나치당과 보수파의 연립을 이끌어내 제1차 히틀러 내각을 만들었다. 후겐베르크는 경제장관 및 농림식량장관으로 히틀러 내각에 입성했다. 이 내각에는 수상인 히틀러, 내무장관인 빌헬름 프리크, 그리고 [[헤르만 괴링]]이 대두했지만 내각 대부분은 여전히 보수파가 많았고, 파펜과 후겐베르크는 히틀러를 제어하여 나치당을 압박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독일 국회 의사당 방화사건으로 [[나치당]]은 일명 [[장검의 밤]]으로 반대세력을 축출하였고 후겐베르크와 파펜은 [[데꿀멍]] 모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히틀러가 1933년 3월에 [[수권법]]으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자 결국 후겐베르크도 [[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1933년 6월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국가인민당도 해산되었다. 또한 후겐베르크의 콘체른도 강제매각되어서 결국 자신의 언론도 나치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후겐베르크는 조용히 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1951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그가 한창 정치를 할 때에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별명이 [[햄스터]]였다고 한다. *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1883년 1월 31일 - 1960년 2월 16일)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공신 중 한 명'''이다. [[독일 제국]]의 군인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외아들이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이종사촌이다. 1903년에 근위 제3 보병연대의 사관으로 입대해 동료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친구가 된 오스카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 20사단 참모로 있다가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남았다. 1925년에 부친이 대통령이 되자 오스카도 대령이 되어 아버지의 부관을 역임했다. 이미 노인이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정치 결정은 실제로는 사적 고문관이던 아들 오스카, 슐라이허, 대통령 부장관인 오토 마이스너가 다 해냈다. 이 때문에 헌법의 위에는 대통령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오스카는 친구였던 슐라이허의 영향을 받아 나치에 호감을 가지고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때문에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나치의 돌격대를 금지시키자 이 조치를 아버지에게 부탁해 해제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카는 원래 자신과 친했던 슐라이허가 총리가 되고 나서 고개가 뻣뻣해진데다가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아들 주제에 너무 나서는거 아니냐?"''' 라는 말을 듣고 격분해 슐라이허와 원수가 된다. 그리하여 1933년 1월엔 다수당이 된 나치당의 당수 히틀러와 파펜 전 수상의 리벤도르프 자택에서 열린 비밀회담에 참석해 나치의 정치 참가를 협의했다. 히틀러를 보헤미아의 상병이라 부르며 수상 지명을 거부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고,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월 28일에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해 나치 정권이 발족되었다.''' 1934년 8월 2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수상이 후임 대통령을 겸임하는 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려 했지만 그 직전에 오스카가 8월 18일에 라디오에서 아버지의 유언이라면서 히틀러를 차기 독일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 추천하니 국민들은 대동단결하라는 의미의 유서를 읽어내렸다. 그러나 당시 헌법에선 대통령이 후계자를 지목할 수 없었고 거기다가 힌덴부르크의 유언장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과 여론은 이미 히틀러에게 넘어가고 있었고 결국 8월 19일에 이루어진 국민투표에서 90%가 히틀러의 대통령직 겸임을 찬성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 결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대신 지도자 겸 수상으로 등극했는데, 이른바 총통으로서 독일의 정치권력이 완전히 히틀러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오스카는 이러한 공적(?)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동프로이센]]의 포로수용소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학살은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바로 군을 사직한 후 소유 중이던 장원에서 은거 생활을 보냈다. 이후 소련군이 침공해 오자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전후에는 뤼네베르거 하이데에서 거주 중이던 지인에게 의탁해 생활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파펜의 재판 시 증인으로 출석했다가 이후 병이 악화되어 하드 하르츠부르크의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 '''[[쿠르트 폰 슐라이허]][* 풀네임은 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이며, 슐라이허는 본인의 인생처럼 '기회주의자', '살살거리는 자'라는 뜻이라는 웃긴 사실이 있다.](Kurt Ferdinand Friederich Hermann von Schleicher)''' (1882년 4월 4일 - 1934년 6월 30일)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총리]]이자 [[군인]]. 그러나 '''그는 [[나치 독일]]이 탄생하게 된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다.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에서 육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슐라이허는 1900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해 근위 제 3 보병연대 제 5중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동료였던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훗날 원수 사이가 되지만--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부대에서는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한 사이였다. 1913년에 참모본부에 배치된 슐라이허는 자신의 희망에 의해 빌헬름 그뢰너 중령의 철도부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지인인 [[프란츠 폰 파펜]]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대위로서 병참부대에 소속되었다가 1917년에 제 237보병사단참모로 대전을 보냈다. 1918년에 소령으로 진급 후 독일혁명 당시 그가 속한 군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주도의 임시정부 협력에 찬성했다. 상관이던 그뢰너 참모차장과 SPD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오토 벨스는 서로 협약을 맺어 두 사람을 반란군의 손에서 구출했다. 이 협약은 잠정정부의 안정과 함께 군부에게 국가안의 국가라는 독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후 병무국장이던 [[한스 폰 젝트]]의 측근이 되어 아들 오스카를 통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개인적 신뢰관계를 쌓은 슐라이허는 독일군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1929년에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후 1931년에는 종형제의 미망인이자 폰 헤닝 장군의 딸이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슐라이허는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리란 이미지로 공화국을 지키려다 희생당한 비운의 민주투사(?)란 왜곡된 이미지가 있는데 애초에 '''파펜을 추천해서 원격 조종하려고 했고, 그 이전에도 민간인들이 감히 범접 못하는 군부에서 정치 뒷공작이나 하던 정치군인 [[똥별]] 출신이다.'''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이 세계 대공황의 선후처리를 위해 경제정책을 손대자 사회주의적이라며 슐라이허는 반대했는데 나치의 돌격대가 대두되자 돌격대 금지령을 둘러싸고 상사였던 그뢰너 국방장관과 마찰을 빚자 그뢰너를 사직으로 몰아넣어 브뤼닝 내각에 큰 타격을 입혔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잃은 브뤼닝 내각은 퇴진하여 슐라이허는 후임 수상으로 오랜 지기였던 파펜을 추천했다. 파펜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슐라이허는 8월에 나치의 수상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부수상직을 제시하면서 여당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사회민주당 오토 브라운이 수반으로 일하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프로이센 쿠데타]]로 해산시키고 정부 지배에는 성공했지만 파펜의 정치능력과 인기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파펜은 의회를 정지시키기 위해 군부를 이용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군권을 잡고 있던 슐라이허가 거부하여 결국 파펜을 실각시켰다. 파펜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상의 협박으로 12월 3일에 슐라이허는 신임 수상으로 취임했다. 파펜의 실각 후 슐라이허는 나치당에 연대를 제안했지만 결과는 슈트라서만 해외로 날라버리고 끝났다. 군부의 자금원조와 신문에 의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우익에선 “붉은 장군”이라며 경멸했고 좌익에서는 프로이센 주 자치정부의 전복 경위에 의해 “반동주의자”라 찍혀서 사실상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강철의 대원수]]에게서 도망쳐 독일에 있었던 [[레프 트로츠키]]마저 그가 '군복을 입은 물음표' 같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그는 우왕좌왕했다. 공산당에 손을 내밀었다가 우파에다가 손을 내미는 둥 한마디로 개판 그 자체였다. 한편 슐라이허에게 실각당한 파펜은 히틀러와 접촉해 이들은 1933년 1월에 은행가의 중개로 두 차례의 극비회담을 가졌다. 1월 22일 회담에서는 슐라이허의 옛 친구이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은행가, 대통령부 장관인 오토 마이스너도 히틀러 같은 인물을 왜 총리에 임명하지 않느냐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여기에 국가인민당도 참여하는 형태로 슐라이허의 포위망이 형성되어 사면초가가 된 슐라이허는 1월 28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담에서 사직을 권고받은 후 '''히틀러를 차기 수상으로 한다는 힌덴부르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그런데 각하, 이 배신 후에는 각하께서 천국에 가시게 될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슐라이허는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독일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위험요소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그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1934년 6월 30일에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일으킨 숙청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으로 신혼 집에서 부인과 함께 총 맞고 죽었다. 그는 현역 육군원수였지만 나치 친위대가 그와 그의 부인까지 살해했어도 [[독일 국방군]]은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가정부는 다음 해에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론 자살로 발표되었고 2년 후에는 슐라이허가 [[에른스트 룀]]과 손잡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꿍꿍이가 있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히틀러가 집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독일에서 까이는 중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까일 예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